이탈리아의 형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C. B. Beccaria)가 이렇게 말했지요.
"역사가 없는 나라의 국민은 행복하다"고.
역사는 언제나 그것을 돌아보는 이들에게 쓰라린 반성과 함께 교훈을 주지요. 베카리아는 되돌아볼 역사가 없는 이들에겐 어리석은 과오도, 어두운 과거도, 그로인한 파국도 존재하지 않기에 그만큼 행복할 수 있다 여겼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류가 자신들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역사도 시작되었기에 실제로 '역사가 없는 나라'가 존재하는 일은 없겠지요. 그 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억지로 그들의 행적을 잊어버리려 노력하지 않는 한 말이죠.
사실,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애써 그 시대의 일을 잊어버리려 노력한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고대 로마 제국에는 기록말살형(Damnatio Memoriae)이라는 게 있어서, 아주 끔찍할만큼 실정을 저지른 황제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지워버리는 일이 벌어지곤 했어요. 그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공문서는 불태워지고, 동전에 새겨진 얼굴은 깎아 없애버리고, 애써 만든 조각상들은 부숴버리는 - 후세의 사람들이 그에 대한 기록을 찾으려 해도 다시는 찾지 못할 정도로 '역사'를 삭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거죠.
우리나라에서도 '역사'를 말소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적이 있었죠. 바로 일제 강점기 시대입니다. 소위 '민족 말살 통치'가 시작된 1931년부터 무려 14년 동안 일제는 '내선일체', 즉 조선과 일본을 한 나라로 규정하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모조리 부정하는 정책을 시행하지요. 한국말은 금지되고, 한국 이름을 억지로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말살정책이란 게 굉장히 지독하게 이루어진 탓에 국내외 독립운동은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하였고, 이에 따라 암암리에 이루어지던 조선 역사 및 우리말 교육도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합니다. 그리하여 1945년 광복이 되었을 때, 20대 이상의 어른들은 모두 기뻐하며 만세를 부르는데, 민족 말살 통치 기간에 태어난 어린아이들은 일본과 우리나라를 한 나라로 여기고 왜 일본이 패망했는데 만세를 부르는지 어리둥절해 했다고 하네요. 위에 예시로 든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해방이 이루어지지 않고 계속 조선이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남았다는 가정하에 만들어진 영화인데요. 지독했던 민족 말살 통치에 관한 기록을 보면 정말 그럴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 섬찟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조선의 역사'를 잃어버린 우리 민족은 과연 행복했을까요?
우리와 이웃한 중국에도 소위 '잊혀진 역사'가 존재합니다. 바로 1960년 전후에 일어난 '대약진 운동' 시기죠. 당시 소련이 미국의 경제력을 능가하겠다는 선언을 하자 이에 질 수 없었던 중국 공산당의 수장 마오쩌둥이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이 '대약진 운동'입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아주 참담한 실패로 끝나게 되지요.
마오는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운동을 추진했다. 소련과의 동맹 관계에서 긴장이 느껴지기 시작한 때, 마오는 농촌에서 공업을 발전시키고 관개공사 같은 대규모 작업을 계획적으로 실시하여 각 지방을 일종의 자급자족 지역으로 만들고자 했다...
... 마오가 참새를 보고 해로운 새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전국에 참새잡이 광풍이 불기도 했다. 평균 5천 가구를 모아놓은 거대 집단 '인민공사'는 더욱더 노동집약적이고 합리적인 생산 조직을 자처했다...
... 사실상 대약진 운동은 금세 참담한 실패로 드러났다. 공장에서나 농업협동조합에서나 간부들은 자꾸만 늘어나는 생산 할당량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중앙 정부는 제대로 경제학적 계산도 하지 않고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목표를 잡았던 것이다. 새로운 결정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즉시 제거당했다. 당시 공산당 간부의 10퍼센트가 축출당했고, 농촌에서는 당 지부 간부의 절반 이상이 교체되었다. 신장 같은 소수민족 지역은 특히 심한 탄압을 받았고 이미 넘쳐나는 노동교양소들도 수만 명을 더 받아야만 했다.
... 전문가들은 1959~1962년 사이에 중국에서 1천4백만 명에서 3천만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정치적 선택의 유토피아는 용납되지 않았다. 1962년 중국공산당 제8기 9중전회 때 류사오치가 주도한 노동분과 회의에서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70퍼센트가 인재(人災), 30퍼센트는 천재(天災)라고 결론을 내렸다. 1979년에 당은 대약진운동의 참사를 인정했지만 상당 부분 자연재해, 특히 가뭄을 실패의 원인으로 돌렸다. 당시에 중국이 가뭄에 시달렸떤 것은 사실이지만 잘못된 관개사업 계획도 한몫을 했다.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은 대약진운동의 역사를 이런 식으로만 알고 있다. 지역 간 교류가 거의 없고 공산당의 선전이 유일한 정보통이었으며 어떤 통계 자료도 발표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중국을 읽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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