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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이 분명하면 디자인은 저절로 - 사진이 있는 북디자인 #2 :: 2010/07/21 18:56
컨셉이 분명하면 디자인은 저절로!
-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줄게

분명 런던을 다녀온 여행기이긴 한데,
온통 책 얘기와 책 속의 인물과 역사 속 인물들 얘기로 가득한 원고 앞에서
담당편집자와 나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우선 본문 진행이 급하니 어찌어찌 판형을 잡아서 글을 흘려놓긴 하였으나, 사진이 실로 난감했다.
사람들이 '런던' 하면 떠올릴 그럴듯한 사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 모든 사진이 10~15도 각도로 기울어져있었다.
아, 이건 또 무슨 만행(?)이란 말인가!
나중에 들으니 이 삐딱한 시선의 원인은 직업병이었다.
인터뷰 할땐 언제나 오른손으로 커다란 마이크를 비스듬히 말하는 사람 입 가까이 대어야 하는지라
그 각도가 몸에 배어 셔터를 누르는 오른손의 각도도 그리되었다는 나름 과학적인 해명이었다.
정녕 라디오 피디에겐 좋은 사진을 기대할 수 없단 말인가?
편집자와 베란다에서 무수히 담배를 피워댄 끝에
4도 컬러와 작별을 고했다. 흑백으로 바꾼 사진을 각 장별로 네 쪽 안팎에 몰아 넣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완성된 책의 모습이 어렴풋하게라도 그려지지가 않았다.
내가 무슨 책을 만들고 있는거지?
정혜윤 피디를 만났다.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cbs방송국 앞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책, 영화, 음악, 그리고 만난 사람들 얘기를 유쾌하고 재미나게 들려주는
정혜윤 피디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진 만행은 용서하기로했다(속으로 혼자서......흐흐).
정혜윤 피디가 어떤 생각 어떤 느낌으로 이 글을 썼는지를 찬찬이 들었고,
얘기를 주고 받으며 우리는 희미한 단서를 찾았다.
그날 이후로도 한동안 편집자가 끙끙대다가 마침내 뽑아낸 컨셉이 바로 '속삭이다' 였다.
언젠가 떠날 당신에게 누군가가 매일 밤 런던 얘기를 전화기를 붙들고 소근소근 속삭여준다니!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전광석화', '일사천리' 였다. 글이 갑자기 자기 본질을 드러냈다.
이글은 아직 런던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 언젠가는 런던에 갈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들,
런던에 가보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하는 사람들, 런던에 가지는 못해도 런던을 좀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와 함께 런던에 가지 못한, 유달리 내말을 잘 들어 주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매일 밤 창가에 날아든 밤새가 그런 것처럼 귀에 대고속삭여주는 심정으로 썼다.
하지만 어쩌면 런던은 핑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쿄와 뉴욕이라고 해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나는 도시의 이름을 빌어 갈망과 호기심과
또다른 세계와 또 다른 삶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도시든 그 도시의 풍경은 자신의 시선과 감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떠난다는 말은 단지 목적지만을 지칭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서문 가운데에서
서문에 이 책의 컨셉이 근사하게 표현되어 있다.
어렴풋하게 어른거리기만 하던 책의 모습이 분명해지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때까지도 무작정 흐르고만 있던 글을 다잡아 새롭게 의미를 부여했다.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사진들도 자기 자리들을 찾아서 후닥닥 정리했다.

1장 도입부 사진 모음 페이지 펼침면

에필로그 중 펼침면
표지도 당연히 속삭이는 모습이 되어야 했다.
정혜윤 피디는 '침대와 책(웅진)' ,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푸른숲)' 에서 모두
자신이 표지 모델이 되었다. 이번에도?
그러기로 했다. 의견을 빠르게 주고 받으며 촬영 계획을 잡았다.
런던의 어디 호텔이나 모텔 쯤. 창문이 반쯤 열려 있고, 부드러운 바람에 커튼이 살짝 흔들린다.
아직 저녁 무렵의 빛이 좀 남아있어서 불은 켜져 있지 않다.
바닥에 벗어 놓은 신발, 여행 가방이 반쯤 열려있고 옷가지가 조금 삐져나와 있는게 보인다.
책 몇 권도 바닥에 놓여 있다.
우리의 속삭이는 주인공은 침대에 앉아(엎드려, 누워) 전화기를 꼬옥 붙들고
'천일야화'를 한없이 속삭이기 시작한다.
뭐 이런 그림을 서로 그렸다.
정혜윤 피디와 친분이 있는 사진가 '이상엽' 님이 사진을 찍어 주기로 했다.
다큐멘터리를 찍던 분이 연출 사진을 찍어야 하는 난감함이 사진가에게 있었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애써주셨다.
핵심 소품은 공중전화기와 아주 오래된 샘소나이트 여행가방이었다.
둘 다 정혜윤 피디가 수완을 발휘해 빌려 온 것인데,
여행가방은 옛 영화배우 문오장 선생이 쓰던 것이었다. 세상에...
큰 가방은 옷가방, 작은 가방은 분장에 쓰던 소품을 넣던 가방인 듯 했다.
작은 가방을 열자 분 냄새가 아련히 밀려왔다.
이 작은 소품 하나에도 놀랄만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회사 안에서도 찍고, 출판 단지 이곳 저곳을 다니며 찍었다.
단지 안에 있는 호텔에서도 찍긴 했으나, 신통치 않았다.
나는 맨 처음 회사 안에서 찍은 사진을 골라냈다.
오래된 나무 소파와 바닥에 깔린 양탄자가 이야기를 만들어 주었다.
서문에 언급된 “천일야화”의 페르시아 여자 셰에라자드 이미지와 겹쳐졌다.
그것에 어울리는 타이포를 영문서체를 참조해가며 레터링했다.
화면작업을 하면서 하나씩 디테일을 조정해나갔다.
모델 얼굴이 부각되지 않도록 어둡게 리터칭하고,
사진 몇 군데를 잘라 일부러 어긋나게 겹쳐서 시간과 공간이 단일하지 않다는 점을 암시했다.
왼손 검지가 지시하는 바가 강했기 때문에 왼손에서 시작해서
가방, 양탄자를 따라서 사선으로 여행지 이름을 흐르게 했다.
사이사이에 여행을 연상시키는 아이콘을 넣어 잔재미도 살짝 얹었다.

다만, 타이포의 가독성이 조금 걱정이었다. 분명히 누군가가 지적할텐데.......
놀랍게도 출판사 견학을 온 초등학생들이 도와주었다.
디자인실에 들어온 초등학생들이 내 자리를 지나치며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가!
또박또박 '런.던.을.속.삭.여.줄.게' 라고 읽었다. 감동이었다.
우리가 항상 예민해하는 '가독성' 문제는 검증되지 않은 그저 우리의 감일 뿐이다.
설득을 하려면 검증해야 하는 것이다. 표지 컨펌을 받는 자리에서 나는 검증했다.
고마워 얘들아. ㅠㅠ
각장 대문(도비라) 디자인과 차례 페이지를 마무리 하고서 오랜 여정을 끝냈다.
각장 대문은 표지 사진으로 찍었던 컷들을 실루엣으로 따내 '속삭이다' 컨셉을 일관되게 표현했다.
장소와 사람, 패턴을 조합해서 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이라기 보다는
상상의 시간과 공간으로 보이게끔 했다.

2장 대문 펼침면
명확한 컨셉, 분명한 '말 한마디'는 디자인을 일관된 방향으로 이끈다.
물흐르듯.
[방송] 런던을 속삭여 줄게 :: 2009/12/0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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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작가와의 만남 :: 2009/11/05 11:20

일찍 오신 분들은 다과를 즐기면서 작가님의 등장을 고대하고 계셨고요.

혀에 남은 달콤함이 가시기도 전에 정혜윤 작가님이 오셨어요.
세련되고 발랄한 그녀의 모습은 책을 읽으며
그 안에서 들리던 목소리로 상상하던 것과 비슷했습니다.

곧, 정혜윤 작가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책에서 미처 다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들과 런던의 다른 모습 뿐만 아니라,
정혜윤 작가님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다시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읽은 수많은 책들에서 인용된 이야기들과 그녀가 전해주는 런던 이야기들은
책의 '속삭임'에서 채우지 못한 갈증을 촉촉하게 해소해줄만큼 달콤한 '목소리'로 다가왔어요.

이야기가 끝나고, 질문이 오고간 후엔 사인회가 있었습니다.
이름을 묻고,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그 기억을 사인 속에 남기는 ㅡ 짧지만 깊은 시간이 흘러갔지요.

사인회를 마지막으로 이날 일정은 모두 끝났습니다.
사람들에 다음엔 어떤 도시를 듣고 싶은지를 묻는 그녀의 모습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가득 등에 진 채로 이걸 들려줄까 말까 하며
장난스레 미소짓는 소녀의 천진난만함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다음에 들려줄 그녀의 도시 속 '이야기'도 기대가 됐구요.
그녀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설명하면서 들려준 이야기-
대성당이 뭔지 알지 못했던 맹인이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대성당을 그려보는 과정에서
대성당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이야기에 이끌려 가는 동안 런던 뿐 아니라 정혜윤 작가와
그녀가 머문 책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되었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만난 런더너들,
런던을 사랑하고, 런던을 꿈꿨던
‘구식’ 런더너와 ‘2009년, 지금’ 런더너들의 이야기!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부제가 붙은 《침대와 책》과 ‘당신을 만든 책은 무엇인가’라는 독특한 주제의 인터뷰집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로 독서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정혜윤, 그의 세 번째 에세이 《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줄게》가 푸른숲에서 출간되었다. 런던을 여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소 8곳에 얽힌 이야기들이 종횡무진 예측할 수 없는 흐름으로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중세와 현대를 넘나들면서 기상천외한 모티프로 사람과 사람, 장소와 장소를 연결시키면서 진정한 여행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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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대영 박물관을 속삭여줄게 :: 2009/11/04 15:56
대영 박물관 잉글리쉬 페이션트, 수메르 문명, 아가사 크리스티, 마르크스,
길가메시 서사시, 시누헤 이야기, 글자로 이뤄진 시, 헨리 무어, 미라의 스트립쇼,
파도 소리와 침묵 속의 노동,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

이렇듯 대영 박물관이 내게는 초현실주의적인 공간으로 느껴지는 것은 7백만 점 유물들을 그저 박물관에 보관 중인 예술 작품으로만 본다면 대영 박물관은 우리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진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이 유물들 중 어느 하나가 나에게 젖은 담벼락이 되어주길 간절히 원한다. 우리가 매끈한 여인의 다리를 털장갑을 끼고 만지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듯 이 유물들을 감히 질문 없이 대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유물을 통해 유물 너머의 어머어마한 문명과 도시들의 이야기를 듣게 될 텐데 이 유물들이 CG의 테크닉이나 상상으로 가득 찬 문장이 아니고, 어떤 구체적인 존재가 꿈을 안고 믿음으로 땅에 발을 붙인 채 밥을 먹고 고민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떨리게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한 가지 주문을 외면서 대영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당신의 소원을 조심하라, 이루어질지도 모르니. 당신의 소원을 조심하라, 흔적을 남길지도 모르니.” 그리고 〈인디애나 존스 4〉에 나오는 크리스털 해골과 《길가메시 서사시》, 서아프리카 왕국 베닌의 흑인 예술가, 미라, 수메르의 점토판들 사이에서 곧 길을 잃고 말았다. (p. 102)
대영 박물관 최고의 자랑거리인 로제타석에서 칭송한 왕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이다. 그는 투탕카멘보다 더 어린 나이인 여섯 살에 왕이 되었다. 그는 사원에 관대했기 때문에 이집트의 신관들은 그를 칭송하는 송덕문을 잔뜩 작성했다. […]
평범한 사람들이 적어놓은 파피루스의 사연들은 대략 이런 내용들이었다고 한다. “저는 노예로 팔려가게 될까요?”, “제가 부자가 될까요?”, “제가 이혼할 운명입니까?”, “누군가 저를 죽이게 될까요?”, “제 자식들이 저와 화해할까요?” 그들은 이 파피루스를 들고 신탁을 향해 뛰는 가슴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쫑긋거리며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들에게 신탁은 알 듯 모를 듯 은유로 가득 찬 말들을 들려줬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다시 새벽길을 걸어 금성을 바라보면서 도시 속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러한 풍경이 내게는 다시 파피루스 속 한 장의 이집트 그림으로 남는다. 여전히 질문을 간직한 채 자신이 출발했던 곳으로 걸어 돌아가는 모습. 나 역시 비슷한 생각에 빠져 그 옆에서 맨발로 동행하고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걷는 내 눈앞엔 세상에서 가장 긴 강인 나일 강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 강엔 아스완의 채석장에서 캐낸 화강암 오벨리스크를 실어 나르는 배가 떠 있고, 그 강으로 곧 밝아올 새벽의 요란스러운 흥정을 위해 선잠 깬 상인들과 어부들이 모여들고, 그리고 강 옆의 집에선 지상에서 착하게 살면 꼭 다시 살아 돌아온다고 믿는 선량한 사람들이 새벽잠을 자고 있는, 그런 풍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p. 117)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만난 런더너들,
런던을 사랑하고, 런던을 꿈꿨던
‘구식’ 런더너와 ‘2009년, 지금’ 런더너들의 이야기!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부제가 붙은 《침대와 책》과 ‘당신을 만든 책은 무엇인가’라는 독특한 주제의 인터뷰집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로 독서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정혜윤, 그의 세 번째 에세이 《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줄게》가 푸른숲에서 출간되었다. 런던을 여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소 8곳에 얽힌 이야기들이 종횡무진 예측할 수 없는 흐름으로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중세와 현대를 넘나들면서 기상천외한 모티프로 사람과 사람, 장소와 장소를 연결시키면서 진정한 여행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정혜윤] 세인트 폴 대성당을 속삭여줄게 :: 2009/09/30 17:22
세인트 폴 대성당 종의 노래, 런던 대화재, 찰스 1세, 흑사병, 크리스토퍼 랜 경,
실낙원, 새로운 아틀란티스, 조슈아 레이놀즈, 탕아와 꼬마 굴뚝 청소부, 라셀라스,
넬슨과 엠마 해밀턴, 니코스 카잔차키스, 속삭임의 회랑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이 완성된 1710년 이후의 어느 날, 런던을 걷는다고 생각해보면 풍경은 이렇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이 완공되어 우뚝 솟아 있고, 시티의 상인들과 중산층의 부와 자신감을 반영한 듯 거리 여기저기에 금박을 입힌 기둥을 가진 교회들이 나타난다. 런던 대화재 때 금화를 조심스레 땅에 묻었거나 장롱에 재산을 넣고 자물쇠를 채웠던 런더너들, 아니면 금을 아예 허리에 두르거나 가족들에게 들려 시골로 보냈던 런더너들은 그 무렵엔 그런 촌스러운 방법을 그만뒀다. 그들 대부분은 금세공업자 출신인 은행원들에게 금을 맡기기 시작했다. 결국 왕국의 모든 자금이 런던에 예치되었고 잉글랜드 은행이 시티에 생겨났다. (p. 75)
사실 라셀라스 시절의 행복관만 궁금한 건 아니다. 동시대의 지구인들에게 행복에 대해 한꺼번에 물어보기 가장 좋은 곳, 그곳이 바로 런던이다. 그래서 여행 전 내 마음속에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었는데 그 프로젝트 제목은 ‘행복이란 말이 이상하게 들려요’ 또는 ‘이런 행복이란 말을 처음 들어요’ 정도였다. 사우스 뱅크 같은 곳에 앉아서 백 개국 언어(그 나라의 정확한 발음들로만)로 ‘행복’이란 말을 채집하는데 그때 인터뷰에 응한 각 나라 사람들은 자기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혹은 자기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유서 깊은 행복해지는 방법, 혹은 자기만의 행복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줘야 한다. 그러면 나는 서울로 돌아와 백 개의 이상야릇한 발음의 행복이란 말을 확성기로 서울 광장의 밤하늘에 날려 보낸다는 것이 내 프로젝트(백 개의 언어가 밤하늘을 마구 날아다니다가 이 집 저 집 들어가는 상상 포함)였는데 기왕이면 사라지는 알래스카 말까지도 넣어보고 싶다는 나의 야심찬 계획은 내가 백 개 국어를 하지 못하는 관계로 좌절되었다. 그래도 어렵사리 채집한 것 중 눈에 띄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p. 83)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만난 런더너들,
런던을 사랑하고, 런던을 꿈꿨던
‘구식’ 런더너와 ‘2009년, 지금’ 런더너들의 이야기!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부제가 붙은 《침대와 책》과 ‘당신을 만든 책은 무엇인가’라는 독특한 주제의 인터뷰집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로 독서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정혜윤, 그의 세 번째 에세이 《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줄게》가 푸른숲에서 출간되었다. 런던을 여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소 8곳에 얽힌 이야기들이 종횡무진 예측할 수 없는 흐름으로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중세와 현대를 넘나들면서 기상천외한 모티프로 사람과 사람, 장소와 장소를 연결시키면서 진정한 여행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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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zac dangers.
Side effects of prozac.
[정혜윤] 디킨즈를 속삭여줄게 :: 2009/09/24 16:33

찰스 디킨스는 1812년 영국 포트 시에서 태어났는데 나중에 그의 가족은 런던 근교의 캠던 타운에 자리를 잡았다. 디킨스는 동생들을 돌보고, 구두를 닦고,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들판과 수로로 둘러싸인 쓸쓸한 캠던 타운을 돌아다녔다.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는 열두 살 때 다만 몇 실링이라도 벌기 위해 구두 공장에 취직해 구두약 병에 상표를 붙이고 포장하는 일을 했던 것과 씀씀이가 헤펐던 아버지가 채무불이행이란 죄명으로 마셜 시 감옥에 수감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의 어머니는 찰스와 나머지 자식들을 데리고 남편이 있는 감옥에서 함께 생활하였다(그 당시엔 죄수가 가족들을 데리고 감옥에서 함께 사는 게 가능했다고 한다).
그는 열다섯 살에 변호사 사무실의 사환이 되었고 속기술을 배워 스무 살 때는 하원 의원들의 토론을 보도하는 의회 담당 기자가 되었다. 그때 일솜씨가 좋아 기자 중 가장 빠르고 정확하다는 평을 얻게 되었다. 기자 시절 신문에 짧게 실었던 런던을 스케치한 글로 주목받기 시작해 《올리버 트위스트》 이후 그는 줄곧 작가로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게 된다.
그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가 아내보다는, 한집에 같이 살며 아이들을 돌봐주던 처제 메리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는 것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 이야기가 더욱 널리 퍼진 것은 안타깝게도 어느 날 메리가 급작스럽게 죽고 그때 디킨스가 메리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서 자신의 손가락에 낀 뒤 죽을 때까지 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더욱더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메리가 죽은 후, 디킨스의 아이들을 돌봐주러 온 그 밑의 처제 조지나 때문이었다.
조지나는 자랄수록 메리와 꼭 닮은 용모와 성품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디킨스는 조지나와 같이 앉아 있으면 메리가 죽은 건 잠깐 동안의 악몽이고, 이제 악몽에서 깨어나는 중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고 편지에 적기까지 했다. 조지나와 찰스 디킨스의 사이는 수수께끼지만 조지나는 늘 찰스 디킨스 곁에 있었다. 서머셋 모옴은 왜 전 세계의 연극인들이 이 에피소드를 무대에 올리지 않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쨌든 디킨스든 조지나든 이 일에 대해선 침묵했다.
그는 런던에서 전 생애를 보냈기 때문에 그의 작품 속에 묘사된 런던은 생생하다. 구빈원의 꼬마 고아인 올리버 트위스트는 원장에게 너무나 배가 고파서 그러니 죽 한 그릇만 더 달라고 부탁했다가 쫓겨나게 되자 런던은 아주 큰 도시이므로 배짱만 두둑하다면 뭘 해도 먹고살 수 있단 생각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위대한 유산》의 핍은 정체 모를 거액의 유산을 받게 되어 런던으로 신사 교육을 받으러 왔는데, 어둠이 내리는 런던의 거리를 보면서 이 거리는 가난하고 낡은 고향집 부엌을 그렇게 멀리 두고 온 것에 대해 “질책하는 듯한 침울한 암시” 같은 게 있다고 느낀다. 사람들을 뒹굴뒹굴 나자빠지게 할 정도로 웃겼다는 낭독의 대가 디킨스는 1870년 세인트 제임스 홀에서 어머어마한 규모의 낭독회를 마치고 나서 건강이 악화되어 6월 9일 숨을 거두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나는 순전히 디킨스가 어린 시절 그곳을 자주 거닐었다는 이유만으로 런던에 있는 동안 캠던 타운에 들러봤다. 그곳은 디킨스식의 쓸쓸함, 혹은 지하철 공사로 인해 지반이 무너지며 황폐해져 산업사회의 위험을 경고하는 곳이 아니라 검은 머리에 꽉 끼는 바지를 입은 위협적인 미녀들과 신비롭거나 공격적인 문신으로 가득한, 폭발할 것 같은 젊은이들과 아프리카, 인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의 이민자들과 “나는 죄를 지을 것입니다”나 “엿 먹어라” 같은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직업이 불분명한 청년들과 거대한 미키마우스나 킹콩의 간판을 단 가게들과 알뜰한 쇼핑객들, 무엇보다도 유명한 프리마켓이 있는, 열기 넘치는 패셔너블한 거리로 변해 있었다.
그곳의 교차로에서 촌티 내지 않고 서 있기 위해선 옷을 대충 좀 찢어야 할 것 같은데, 언제나 분위기에 약한 나는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재빨리 티셔츠의 어깨를 약간 흘러내리게 했던 기억이 난다. 자미로콰이풍의 음악이 들리는 가운데 한 소년이 야단스런 옷을 파는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에도 건강하게 발칙한 도전의 기미가 있었다. 디킨스처럼 가난한 어떤 소년이 틈날 때마다 어떤 위험이 있는지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캠던 타운의 거리를 쏘다니고 있을지 몰라도, 그 소년이 그 어린 시절의 경험을 30년 뒤까지도 잊지 못할지 몰라도, 아마도 그 소년이 글을 쓴다면 디킨스와는 분명히 다른 글이 나올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런던스러운 것, 혹은 영국스러운 것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위반에서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알라신 때문에 고민할지도 모르고, 복잡한 혼혈의 결과로 피부 색깔의 농도가 정체성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서 고민할지도 모르며, 혹은 레즈비언인 엄마에 대해 고민할지도 모른다. 어느 날인가는 할아버지와 고조할아버지의 나라로 여행을 가는 의무적인 가족 여행 계획이나 옛날 조상들의 섬에 전해 내려왔다는 야릇한 전설을 들을 때 짜증을 냈던 것과 끊임없이 먼 나라에서 찾아오는 친척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것을 기억해낼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케밥, 카레, 향초 섞은 육수, 새 옷, 매연 냄새가 가득했던 그 거리의 냄새를 미친 듯이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삶은 넌센스와 부조화, 부조리 쪽에 가까울 것이지만 여러모로 흥미진진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게 캠던 타운의 정체불명의 활기가 내게 말해준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만난 런더너들,
런던을 사랑하고, 런던을 꿈꿨던
‘구식’ 런더너와 ‘2009년, 지금’ 런더너들의 이야기!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부제가 붙은 《침대와 책》과 ‘당신을 만든 책은 무엇인가’라는 독특한 주제의 인터뷰집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로 독서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정혜윤, 그의 세 번째 에세이 《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줄게》가 푸른숲에서 출간되었다. 런던을 여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소 8곳에 얽힌 이야기들이 종횡무진 예측할 수 없는 흐름으로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중세와 현대를 넘나들면서 기상천외한 모티프로 사람과 사람, 장소와 장소를 연결시키면서 진정한 여행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정혜윤] 런던을 속삭여줄게 - 들어가며 :: 2009/08/28 10:40
<런던을 속삭여 줄게>는 아직 런던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 언젠가는 런던에 갈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들, 런던에 가보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은 하는 사람들, 런던에 가지는 못해도 런던을 좀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썼다.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든 런던에 한번 가봐야 겠다고 내심 계획을 세우고 있는 성실하고 검소한 부모들, 더 알기를 포기하지 않는 중년들, 새로운 계기를 얻기 원하는 청춘들을 위해 썼다.
평생 딱 한 번밖에 가보거나 어쩌면 혹은 아예 가보지 못할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와 같이 런던에 가지 못한, 유달리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매일 밤 창가에 날아온 밤새가 그런 것처럼 귀에 대고 속삭여주는 심정으로 썼다.
이 책을 쓰며 어린 시절에 읽은 교과서나 동화부터 수많은 전문 서적까지 많은 책들의 도움을 받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수많은 텍스트가 있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에게 여행은 여행가기 전 어느 날부터, 아니면 더 먼 옛날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런던에서 시작해 어느 도시에서 끝나게 될지 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모든 텍스트는 영원하고 모든 여행은 영원하고 모든 꿈은 영원하고 모든 사랑은 영원하다.
우리 가여운 인간들에게는 연대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 가여운 인간들에게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리 이 여행기를 읽는 동안 서로 귀를 기울여주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미소를 짓자. 서로 사랑하는 우리는 아름다운 것은 두 겹으로 아름답다고 말하고, 좋은 것은 두 겹으로 좋다고 말하고, 슬픈 것은 두 겹으로 슬프다고 말하자. 여행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이제 우리 무한히 계속되는 이야기의 첫 계단으로 들어가자. 이야기들은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고 추억은 또 다른 추억을, 여행은 또 다른 여행을 품고 있다. 마치 천 일 동안 계속되는 이야기처럼. 그리고 나 자신으로 말하자면 이 여행기를 쓰는 동안 나는 수백 개의 다른 자서전을 갖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