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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비밀스러운 카페의 동네 Day 2 - 그때는 시간이 멈춰 있는 줄도 몰랐답니다 :: 2010/09/03 19:20

#1. 그땐 시간이 멈춰 있는 줄도 몰랐답니다

▶ 사실 현재의 나는 과저의 내가 아니고, 미래의 나도 아닐 것이다. 수많은 사람처럼 현재의 나는 암흑 속에 있는 의식의 한순간에 불과하다.

 <루시아, 거짓말의 기억> 중


제길슨을 닮은 그 남자가 핸드폰 문자 작성을 마쳤다. 그의 손가락이 핸드폰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있던 나는 카페 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말 소리도, 찻잔이 어딘가에 부딪혀 나는 달그락 거리는 소리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카페 안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탁자 위에 놓인 커피에서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주인을 잃은 컴퓨터는 홀로 빛을 내뿜고 있었고, 방금까지 사람들이 앉아 있던 의자는 모두 밖으로 빼어진 채였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 외에 달라진 점은 없었다. 내가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사람들이 카페 밖을 지나가는 무엇엔가 홀려 일렬로 줄을 지어 나가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1974년에 스페인 앞바다에서 수백명의 사람들과 함께 침몰된 주제에 1990년 영국 항구마을 윌립톤에 뻔뻔스레 얼굴을 들이민 라스 트레스 마리아스호를 떠올렸다. 그 배 안에 차려져 있던 음식들은 갓 차린 것 마냥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고 했다. 그 배는 16년의 시간과 수백명의 사람을 집어삼켜 놓고선 오리발을 내밀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유령선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제길슨을 닮은 남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에서 핵폭탄이 폭발해 내뿜는 화염을 뚫고 천연덕스레 멀쩡한 모습을 드러낸 외계인 함선을 바라보는 미 국방성 직원의 눈빛 같았다. 나는 그가 제길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제길슨이라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그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뭔가 욕을 내뱉고 싶었다. 그러나 욕을 내뱉은 건 그가 먼저였다.

"뭐야, 이 얼간이가 여기 왜 있지?"

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제길슨은 내가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안심한 듯 중얼거렸다.

"움직일 수 없는 게 당연하지. 넌 원래 여기 있어서는 안되는 거였으니까."

제길슨이 내 앞에 와서 섰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쏘아보려 했다. 그러나 고개마저 빳빳히 굳어버린 것 같았다. 그 순간 제길슨이 징그럽게 쪼개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아까 카페 안을 둘러볼 때에도 고개를 돌렸다는 기억은 나지 않았다. 마치 카메라가 한번 쭉 비추고 간 것처럼 머릿 속에 카페의 풍경이 들어왔었다. 꿈 속에서 절대 볼 수 없는 곳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네 녀석이 어떻게 나를 따라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봐두도록 해. 이곳이 어떤 곳인지,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길슨이 말하고 있는 사이 카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나는 그 쪽을 '보려'했지만, 뭔가에 걸린 듯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의 다리 밖에 보이지 않았다. 검은 색 하이힐을 신은 여자의 다리였다. 제길슨이 그 사람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하고 말을 이었다.

"... 그리고 네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그 사람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의 얼굴이 머릿 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녀였다. 짝사랑하는 옆집 여자애의 얼굴을 달려가며 힐끗 훔쳐보고 지나가는 것처럼 짧게 지나간 얼굴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 여자가 그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길슨. 이번에도 글렀어요. 이 곳도 아니였다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점점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제길슨은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외국인 특유의 과장된 제스쳐가 역겹게 느껴졌다. 그때 그녀가 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나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걸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다가오는 걸음을 멈췄다는 것도, 그녀가 짧게 뭔가를 생각했단 것도, 그녀가 뭔가를 말하려는 듯 숨을 들이쉬는 그 순간마저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0.00001초도 되지 않는 거의 멈춘거나 다름 없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때 시간이 멈춰 있다는 것도 몰랐다. 머릿 속에서 그녀에 대한 수십가지의 생각과 눈으로 보지 않고도 느껴지는 그녀의 움직임이 휘몰아치며 얽혀들었다.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

잔뜩 긴장한 활시위에서 튕겨져 나온 화살처럼, 그녀가 입을 떼자마자 나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2. 열중할 공간과 소통할 공간, 그리고 사랑할 공간 : 카페 Wonderland

▶ 방금 들려준 이야기는 모두 내게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일이다. 종종 우리의 기억조차도 매우 낯설 때가 있다. <루시아, 거짓말의 기억> 중

그때의 내 모습이 어땠냐 하면, 맛있게 요리되어 온 몸에 잔뜩 소스를 묻히고 접시 위에 도사리고 앉은 스테이크가 딱 그런 모양이었을 것이다. 뚜껑이 덮혀 있는 터라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나를 맛있게 먹어치울 '주인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제 몸에서 올라오는 맛있는 냄새에 자신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제 멋에 겨워 정신 못차리고 이 여자 저 여자를 오가며 '임자'를 찾아 헤매던,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뚜껑을 열어준 것이 그녀였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를 처음 '인식'했던 때는 아직도 머리 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비가 오는 날이었고, 실내는 습하고 어두웠다. 카페 안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만남을 위해 모인 것도 아니었고, 친교를 위해 나누는 대화도 아니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필요'에 의해 모인 관계였다. 우스운 것은 그때 당시엔 굉장히 중요하다 여겼던 그 모임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는 점과,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만남은 대부분 '생각나지 않을 중요함'을 내포한 자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카페 원더랜드는 홍대입구역 4번 출구로 나와 걸어들어가면 보이는 서교초등학교 골목 중간쯤에 있다.

2층에 위치해 있어 한번에 찾기는 좀 어렵지만, 깃발 모양의 간판과 테라스가 눈에 띄는 편이라 작정하고 찾으면 금방 찾을 수 있다.

원더랜드는 테라스와 복층구조를 가지고 있는 카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단체석과 골목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책장 너머 안쪽에 위치한 실내 오브제를 리모델링한 좌석들과 복층에 있는 좌식 자리의 느낌이 각각 다르다.

'작업실'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소음이 있지만
묘하게 집중이 잘 되는 분위기다.

그래서인지 단체석과 벽에 붙은 테이블 자리엔 노트북을 들고 와서 혼자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주 앉아 있다.


그때 나에겐 '중요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없었다. 그저 하루 하루 즐겁기만 하면 되었고, 진지한 것과 어려운 것은 질색이었다. 정색을 하며 다가서는 이들은 무시했고, 어려운 부탁이나 명령을 받게 되었을 땐 대충 웃어 넘겨버렸다. 책임감이 없는 놈, 경박스러운 놈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지만, 내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편하게 생각하고 포기할 건 쉽게 포기해버리는 그런 삶이 '쿨'한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날 모임에서도 나는 '쿨'해지려 노력했다. 모두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 문제를 가볍고 하찮은 것으로 대하는 것이 그날의 '쿨'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런 나의 태도에 반감을 가지다가도 이내 익숙해져서 포기해버리는 것을 보는 게 좋았다. 사람들은 그날따라 말이 없었고, 그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한 진전사항은 없었다. 나는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쿨'했으니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모임이 끝나면 만날 사람과 약속을 정하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날카롭게 나를 쏘아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또 쓸데없이 진지해져버린 사람이 있군'하고 생각했다. 그런 진지한 관심은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때였다.

"당신...!!"

'당신'이라는, 젊은이들 사이에선 흔하지 않은 호칭이 어색하다 느끼기에 앞서, 그 목소리에 담긴 묘한 존재감이 그녀를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계속)

2010/09/03 19:20 2010/09/0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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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파주출판도시 가을책잔치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 2010/09/02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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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도 가을책잔치에 참여합니다.
행사에 오시면 푸른숲 부스에 꼭 들려주시고
자세한 행사 내용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세요.

http://www.pajubookfest.com


 

2010/09/02 09:23 2010/09/02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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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탕화면] 9월 도서 월페이퍼 :: 2010/09/0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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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1 18:01 2010/09/0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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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비밀스러운 카페의 동네 - Day 1.5 - 지금 나는 너무 행복하다라고 말해야 했었다 :: 2010/08/27 16:08

#2.5 . 그러니까, 아메리카노는 너무 쓰다고요 - 여전히 <작업실>

 작업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사랑에 빠져 있었다. 눈 앞에 펼쳐든 책, 쉴새없이 이어지는 친구와의 수다, 카페 구석 천장에 달린 전등, 혹은 아까부터 귓가에 조근조근 속삭이듯 울려퍼지고 있는 음악 소리. 그들에겐 그 외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들이 카페를 찾는 이유는 누군가와, 혹은 무엇인가와 짧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일 것이다. 방해받지 않고 한 가지 것에 열중할만큼 뜨거워질 수 있는 공간은 점차 줄어들고 있으니까.
 
눈 앞의 아메리카노가 잔 속에서 하얀 김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잔 옆에는 미국 작가 크리스토퍼 무어의 <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 중 무엇과도 사랑을 나눌 수 없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제길슨을 닮은' 남자였다. 만일 그 남자가 제길슨이라면, 이 카페에서 사랑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은 그와 나 뿐일 것이다. 나는 제길슨을 사랑할 수 없을만큼 증오하고 있었고, 제길슨은 적어도 카페 안에서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작업실에는 달팽이 책장 말고도 소소한 소품을 보는 재미가 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포스트 잇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소소한 메모가 적혀 있다. 그저 날짜와 이름, '왔다 갔음'만 덩그라니 적혀 있는 쪽지는 없다. 사람들은 이곳의 쪽지엔 그림으로든 글로든 자신의 '생각'을 담은 이야기들을 남겨놓는다.

왔다 간 걸 기념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보다 진솔한 글을 남긴다.

거장들의 글에서 삶에 대한 초연함이 느껴지는 건,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굳이 기념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제길슨을 닮은 남자는 책을 읽는 와중에 이따금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확인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커피를 마시는 척 하며 그의 동태를 살폈다. 스타벅스에서 융단폭격을 받았던 내 혀는 사탕을 꺼내 물어도 쓰다 느낄만큼 아메리카노의 쓴 맛에 푹 절어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 내가 집중하는 것은 그가 이 '카페'라는 공간을 대하는 태도였다. 예전에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기에, 그가 제길슨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의 태도에 주목하는 것 밖엔 없었다.

  그의 앞에는 그의 손바닥만한 잔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엔 그가 가방에서 꺼낸 검은 색 표지의 외서가 있었다. 그는 책을 뒤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로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그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더 이상 그녀와 연락할 수 없는데, 그는 천연덕스럽게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다니. 나는 그가 제길슨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커다란 손가락으로 어렵게 자판을 누르며 문자를 보내고 있는 저 중년의 외국인이 제길슨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 지금 나는 너무 행복하다라고 말해야 했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느니라" - 마태복음

  지금 나는 너무 행복하다라고 말해야 했었다.

  교과서와 여러 성현들의 말씀은 자기가 행복하다고 여기는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가르쳤지만, 그것을 굳이 말로 표현하라고까지는 가르치지 않았다. TV 드라마와 영화, 신문들은 '고난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삶에 스포트라이트를 퍼부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얼굴에 인상을 쓰며 고뇌하는 검은 수트를 입은 주인공의 등은 항상 조명을 받아 은색으로 찬란히 빛났다. 남들이 웃고 즐거워하는 연회에서도 주인공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랑에 빠진 주인공이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여자와 함께 뒹굴라치면 어김없이 나쁜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울렸다. 남녀 주인공이 행복해하며 끝이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나는 그 뒤에 나쁜 소식을 알리는 전화벨이 울릴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극적인 승리 후에도 "나는 아직 배고프다"라고 외친 히딩크는 성공적인 지도자로 추앙받았고, 그는 '만족'이라는 표현을 아껴 더욱 존경받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행복'이라는 말을 아꼈다.

  그게 문제였다. (계속)

2010/08/27 16:08 2010/08/2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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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독서 취향을 따라간다는 것은② -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 :: 2010/08/26 17:08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나도록 나는 그 사람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가 마음을 터놓는 것으로 보이는 선배와 친구 관계를 파악한 뒤, 심지어 그들에게까지 인정받기 위해 안달했던 것 같다(피곤한 성격이다. 지금의 될 대로 되라, 식의 성격은 당시에 대한 반작용일지도 모른다). 정작 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동기인 선배가 지나가듯 흘린 “근데 P는 꼭 네가 잘 있는지 묻더라. 너희 둘이 친했나?”라는 한 마디로 한 달은 거뜬히 견딜 수 있었다.
 나중에 그 선배는 고백했다, 내 표정만 봐도 절절한 감정이 다 드러나서 용기를 주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라고, 하지만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그런데 나는 그의 어떤 점에 그토록 매료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모습, 곁에 있는 다른 사람을 보이지 않게 배려하는, 남자들에겐 보기 드문 성품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겸손했다.
“그는 얼마나 겸손한가? 그는 모든 것을 미안해했다. 자리에 있는 것, 말하는 것, 조용히 있는 것, 생각하는 것, 눈부시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표현하는 것, 심지어는 비길 데 없는 칭찬을 아낌없이 베푸는 것에 대해서도.” _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그리고 삼 주가 더 지났을 무렵, 나는 작은 사실을 하나 알게 된다. 그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내가 참고서처럼 읽고 있던 <에티카>는 그 여자가 활동하던 철학 동아리에 그가 갓 가입해서 읽게 된 첫 책이라는 것. 그의 취향과는 무관한, 그가 그녀에게 가기 위한 책. 나는 그것을 읽고 있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냥 내팽개쳐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실은 나의 순진무구한 전략이 우스워지는 게 싫어서 오기로 두 달을 더 그 책을 붙잡고 있었다. 내가 그 책을 순수한 동기로 읽게 된 것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하지만 그 책을 손에서 떠나보낼 즈음에 나는 큰 사실을 또 하나 알게 된다. 그가 호감을 가졌던 그녀에겐 오래된 남자친구가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연모하는 이들이 두엇 있었다는 것. 그는 그중 하나라는 것. 나의 마음을 아는 선배는 ‘곁에서 지켜보다가 그가 힘들어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여자가 되는’ 전략을 실행해보라 했다. 나는 피곤하다 했다. 사실 스피노자 선생과 함께한 오랜 시간 끝에 내 마음은 피곤에 전 지 오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의 연애는 부정적인 결말을 맞았고, 그는 꽤나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불쑥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떠난다고 했다. 나는 아무런 사심 없이, 실은 마지막으로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자른다는 심정으로 그에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내가 가장 즐겨 읽던 쿤데라의 책이었다(그때 그의 자취방에서 꽂혀 있던 책 중에서 나의 취향과 일치했던 단 한 권의 책이 그것이었다는 건 맹세코 기억하지 못한 채였다). 나중에 교토에서 도착한 그의 엽서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우리 둘, 책 읽는 취향이 비슷한 것 같아. 계속 편지해도 될까?”
 드디어!

 무솔리니에 대한 열정을 자아의 일부로 만드는 이는 정치 투사가 되고, 고양이를, 음악을, 혹은 고가구를 찬양하는 이는 친구들에게 그것을 선물한다.
 슈만을 좋아하고 슈베르트를 싫어하는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와는 달리 당신은 슈베르트를 미치도록 좋아하고 슈만이라면 진저리를 친다. 당신이라면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누구의 음반을 줄 것인가? 그가 좋아하는 슈만의 음반인가, 아니면 당신이 좋아하는 슈베르트의 음반인가? (...) 어쨌거나 당신이 어떤 선물을 한다면 그것은 애정 때문이요, 당신 자신의 일부를, 당신 마음의 한 조각을 주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_밀란 쿤데라, <불멸>

그땐 몰랐다. 진짜 계속 편지만 하게 될 줄은…….


글. 촉촉한 카스테라

2010/08/26 17:08 2010/08/2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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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띠보 | 2010/08/27 09:22 | PERMALINK | EDIT/DEL | REPLY

    옴마야. 복잡다단한 관계망을 쭉 따라가다보니
    괜시리 숨소리가 잔잔해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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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한 변칙영업, 백화점 매장을 가다! - 서점의 사생활 #6 :: 2010/08/25 10:10

생존을 위한 변칙영업, 백화점 매장을 가다! - 영풍문고 일산점

근래 일산에 대형 백화점에 서점들이 입점했다.
반디앤루니스는 H백화점, 영풍문고는 L백화점에 입점했다.
반디앤루니스는 조만간 8월 26일 오픈 예정이고 영풍문고는 오픈한지 한 달 정도 되었다.


<매장 입구>

보통 백화점에 입점한 서점은 꼭대기 층에 위치하게 되는데
백화점 문화센터와 세트구성으로 구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만 보면 왠지 백화점에서 구색 맞추기용 으로 구성한 게 아닌가 싶다.

‘우리 백화점 정도면 1~8층까지는 온갖 명품을 팔지만 꼭대기 9층 한 귀퉁이에서는 책도 좀 팝니다.’ 이 정도 느낌…….
백화점 1층 명품관 옆에 서점이 들어오는 그날까지 계속 투덜거리리라!
이런 불만을 가지고 9층에 도착해서 매장을 둘러본 결과 서점의 생존전략에 감동하고 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특화된 매장이 이곳 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 오후 이 서점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소리는 아이들 소리다.
우는소리, 웃는 소리, 떼쓰는 소리 등등 아이들과 엄마의 실랑이가 여기저기서 보였다.
평일 백화점의 주요 고객이 주부들인 점(주말도 다르지 않다), 여대생, 여고생 등등 매장 성비가 굉장히 편파적이었다.

서점의 진열 또한 편파적이고 편향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입장이고 서점을 찾는 대부분의 고객은 그들의 친절한 상품 구성에 좀 더 쉽게 지갑을 열지 않을까 싶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진열>


또 하나 감탄을 연발했던 사항이 있는데
서점의 고급화 전략이다.

설명이 필요 없고 사진으로 보시면 되겠다.

<창밖 풍경>

많은 서점을 다녔지만 이토록 좋은 환경과 뛰어난 뷰를 자랑하는 독서 공간을 제공한 서점은 없었다.
이것 하나만으로 일산 사는 사람이 부러워 졌다.

백화점에 입점해 있으므로 그들은 백화점 측 사람들의 눈치를 받게 된다.
매장을 임대 받아 사용 중인 세입자 입장이다 보니 못 하나 박는 것도 눈치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보통 할인 행사 밑 출판사 주도 이벤트나 홍보물 진열이 거의 불가능 하다.
(지저분 또는 정신없다는 이유로……. ㅠ.ㅠ)
백화점 스타일에 반하는 영업행태에 대한 규제가 꽤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백화점 서점이 증가하는 이유가 뭘까?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서점은 메인이 될 수 없다. 백년 있어도 서브다.
사실 타 매장에 비해 매출이 높은 것도 아니다. 차라리 마트에 입점한 서점이 매출 면에서 더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서점의 노림수는 백화점을 등에 업고 브랜드의 신분상승을 노리는 것이 아닐까 한다.
고급 고객들을 회원으로 만들고 그들이 계속 그 서점을 이용해 준다면,
브랜드를 기억해 준다면 서점도 밑지는 장사는 아닐 거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대형 서점은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들이다.
경기가 안 좋아서, 온라인 서점의 선전 때문에, 오르는 인건비 때문에, 이중 삼중고를 겪고 있는 서점들이 손해 보는 선택을 할 리가 없다.

그들의 무궁한 생존을 기원하며
건투를 빈다!

2010/08/25 10:10 2010/08/2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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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엘시스테마, 꿈을 연주하다 :: 2010/08/19 17:26

엘시스테마, 꿈을 연주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체피 보르사치니 지음 | 김희경 옮김

35년간 음악으로 30만 명의 삶을 변화시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혁명, '엘 시스테마 (El sistema)'


간단 소개

음악이 가져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혁명! 엘 시스테마

  음악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을까? 총을 들고 거리를 떠돌던 아이가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어 콘서트에 참여하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고단한 삶을 술과 마약에 기대어 견뎌내던 사내가 아들의 연주를 듣기 위해 클래식 공연장을 찾는 일이 가능할까? 이런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베네수엘라에서는 지난 35년간 30만 명의 삶에서 매일같이 일어났다.


《엘 시스테마, 꿈을 연주하다》는 남미 최대의 산유국이지만 극심한 빈부격차로 전 국민의 30퍼센트 이상이 빈민층인 나라, 총격 사건과 마약 거래, 폭력으로 얼룩진 나라 베네수엘라에서 거리의 아이들에게 무료로 악기를 나눠주고, 오케스트라 연주를 가르쳐 아이들을 가난과 폭력에서 구해온 음악 교육 시스템 ‘엘 시스테마(El Sistema)’의 35년 역사를 담고 있다. 음악이 한 사람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빈곤과 체념의 문화가 대물림되는 것을 막아 그의 가족과 마을, 사회를 변화시키리라 믿은 초기 개척자들의 헌신, 그 혜택을 받아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난 음악가들, 또 그들에게 음악을 배우는 다음 세대 아이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 책은 지금껏 부분적으로만 소개된 엘 시스테마의 온전한 모습을 국내에 소개하는 첫 책이다.

 엘 시스테마는 1975년 경제학자이자 음악가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가 최초의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창립하면서 시작되었다. 빈민가의 차고나 창고를 전전하며 연습하던 오케스트라는 국내외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치르며 규모를 키워갔고, 오케스트라 멤버들은 전국 각지에 음악 교육 센터를 세워 빈민가 아이들에게 악기 연주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60퍼센트 이상이 사회 경제적 빈곤 계층으로, 가난과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던 아이들은 음악을 배우며 비로소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처음부터 솔로보다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중심으로 실시되는 음악 교육은 거리를 떠돌던 아이들에게 소속감을 주고, 단체 생활을 통해 질서와 규율, 책임과 의무, 배려와 헌신 등의 가치를 익히게 해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현재 전국 221개의 음악 학교와 5백 개가량의 오케스트라에서 30만 명의 어린이, 청소년들이 음악을 배우고 있다. 그들은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장한 구스타보 두다멜이나 에딕손 루이스를 바라보며 탁월한 음악가를 꿈꾸기도 하고, 음악 이외의 분야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멋진 선배들을 보며 또 다른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지난 35년간 엘 시스테마가 이룬 가장 큰 성취는 함께 연주하며 자기 앞에 놓인 불행과 싸워나간다면 누구에게나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음악의 약속’, 꿈꾸는 자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흔들림 없는 믿음일 것이다.


책 속에서...

  “베네수엘라의 평범한 가족을 한번 상상해봅시다. 어느 주에 사는 가족이든 상관없습니다. 아버지는 맥주를 마시며 TV의 스포츠 중계를 보고 있고, 어머니는 집안일을 하느라 바쁩니다. 저쪽 방에는 바이올린으로 비발디를 연주하는 어린 소년이 있습니다. 이 소년을 둘러싼 음악은 삶에 질서를 부여할 몇 가지 기준을 소년의 가슴속에 심어줍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가족 구성원들에게 전염됩니다. 장담하건대 맥주를 마시며 야구 경기를 보던 사내는 3년 안에 아들이 주립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는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기 위해 베네수엘라의 어느 공연장에 앉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아이, 그러니까 우리의 바이올리니스트는 이웃들까지도 바꿔놓게 될 것입니다. 이웃들은 바이올리니스트 아이가 자기 동네 몇 번지에 산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 135~136쪽

* 매년 엘 시스테마에서 탈락하는 청소년과 아이들의 비율은 얼마나 되나요?
탈락이라는 말은 부적절합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은 좌절을 느꼈기 때문이거든요. 엘 시스테마에서 중요한 것은 여기에 참여한 사람이 직업인으로서든 음악인으로서든 또 다른 무엇으로든 다양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오케스트라에 남지 못하는 사람들도 사회 안에서 보다 완전하고 통합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문화적 지식을 엘 시스테마 안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 103쪽

음악원에서 매주 한 시간 반씩 악기를 배우고 집에 돌아가 혼자 연습하는 전통적인 음악 교육 방식은 사람을 고립시키고 좌절하게 합니다. 반대로 오케스트라 활동에서는 서로의 관심과 경험, 가치, 기술이 공유되고 건강한 경쟁 분위기가 조성되지요. 이 모든 것은 음악가가 좀 더 폭넓게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요인입니다.〔…〕나는 누구라도 말하는 방법을 모르면 읽고 쓰는 걸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엘 시스테마의 본질은 악기를 아이들의 손에 쥐여주면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아이들은 악기를 직접 손에 들고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면서 음악을 어떻게 쓰고 연주해야 하는지 훨씬 빨리 배우게 되지요. - 98~99쪽


작가 및 역자 소개

체피 보르사치니(Chefi Borzacchini)
베네수엘라의 카톨리카 안드레스 베요 대학교의 사회적 커뮤니케이션학과에서 문화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1981년부터 87년까지 일간지〈엘 나시오날〉에서 음악, 춤, 발레, 문화 정책 등의 문화 관련 기사를 썼다. 1988년부터 90년까지 일간지〈엘 디아리오 데 카라카스〉에서 일했고, 1990년에 다시〈엘 나시오날〉로 돌아와 2002년까지 12년 동안 문화면을 이끌었다. 13개 베네수엘라 문화예술 기관에서 문화 저널리스트에게 수여하는 미요 베스트리니 상의 첫 번째 수상자이고, 1995년에는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저널리스트에게 수여하는〈엘 나시오날〉의 엔리케 오테로 비스카론도 상을 받았다. 현재 베네수엘라의 여러 문화 관련 기관에서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이 : 김희경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미국 로욜라 매리마운트 대학교 경영 대학원을 졸업했다. 17년 8개월 동안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다. 《흥행의 재구성》,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을 썼다.

2010/08/19 17:26 2010/08/1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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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 사랑 좀 해본 편집자의 기획 일지 #5 :: 2010/08/16 16:04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내 떡이 아니면 빨리 옆집을 찾아가도록 도와줘라. 그것이 출판의 도리다. 퇴짜를 놓은 원고가 다른 출판사에서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도 많다. 이때 편집자에게 비난의 시선을 보내지 마라. 임자를 만났다고 생각하라. 출판의 순리다.”
김학원, 《편집자란 무엇인가》, 휴머니스트, 2009, 88쪽

제대하고 심심하기 그지없었던 복학생 시절, 한 후배가 소개팅을 하라고 합니다. 오케이. 말 나온 김에 당장 오늘 만나자고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되니 떨려오기 시작합니다. (이건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었는데) 학교에서 농구하던 친구 둘을 불러 함께 약속 장소에 나갔습니다.
‘딱 2초’라고 했던가요. 처음 인사를 하는 순간 그날의 자리는 결정이 났습니다. “우리는 잘돼야 친구, 오늘은 즐거운 술판.” 다행히 재밌게 놀고 헤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주선자가 양쪽에 다 확인을 한 모양입니다. 예상대로 둘 다 “오늘 즐거웠다. 좋은 사람이다”라는 정답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상 못한 돌발. 그쪽에서 이런 말을 한 모양입니다.

“친구로 나온 한 분 되게 재밌더라.” 그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한마디 한마디가 썰렁하여 ‘무덤’이란 별명을 가진, 술 마시다가 뜬금없이 하이파이브를 하고, 자기 얘기 안 들어주면 기어이 화를 내고 마는, 아무튼 그런 친구였습니다. 아뿔싸, 얘가 재밌다니. 굴욕감보단 ‘이거 흥미진진한데!!!’ 확인해보니 (물론 자기를 재밌어하는 희귀한 여인인데 어찌 감격을 하지 않았을까만) 이 친구도 마음에 들어 하는 듯. 그 뒤로 일은 일사천리. 지금은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 부부 결혼에는 저도 지분이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곤 합니다.

취향의 문제인지, 능력의 문제인지

트위터를 하면서 자격지심, 측은지심이 드는 때가 종종 생깁니다. 얼마 전 스티비 원더 공연 같은 겁니다. 제가 아는 그의 노래라야 <Isn't She Lovely>나  <I Just Call To Say I Love You> 정도. 그런데 남들이 다 그에게 열광하니 잘 모르는 저로서는 저의 문화적 감수성과 문외한인 사실에 절망하게 되는 거지요.

편집자로 확인되고 추정되는 사람들을 수집하듯이 팔로(follow)하니 이런 때가 더 많아집니다. 한 사람이 어느 작가의 소설을 이야기하면, 다른 편집자는 그 작가의 다른 소설을 언급하며 완전 공감이라고 리플을 답니다. 저로서는 참, 정말, 몹시, 신선한 사람입니다. 원고를 보다가 푸코와 데리다와 기타 등등이 나올 때면 역시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할걸 후회가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 나의 취향과 교양은 중3을 타깃팅한다는 TV 예능과 같은 급이구나’ 좌절하기도 합니다.

실은 처음에 출판사 들어와서 겪었던 곤란함과 불안도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저 책 좋아하는 정도인 저로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독서력과 감수성으로 무장한 편집자들. 편집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깊이와 세심함이라면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는데. 자괴와 후회와…… 아무튼 겁이 났습니다(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없는 건 없는 거고, 잃을 것도 없으니 덤벼보자는 심산이었습니다(역시 그 상태 또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장관리는 그만. 깜냥대로!

사실 욕심은 많습니다. 《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처럼 눈물 날 만큼 뿌듯한 사람들도 또 찾아 만들고 싶고, 준비하고 있는 좋은 경제경영서들을 쭉쭉 뽑아내 멋진 브랜드로 만들어가고 싶고, 묵직한 울림을 주는 이들과 인연을 맺어나가면서 사회적 발언을 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하고 싶으니 당장은 아니더라도 줄이라도 이어놓고 있자는 마음도 있습니다. 이게 어장관리가 아니고 뭐겠어요?

그런데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분명 다르잖아요? 또 한 번에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총량도 나름 정해져 있잖아요? 어린아이들이 그렇듯이요. 분명 다 못 먹을 거 아는데, 그거 좋아하지도 않는 거 아는데 “좀 나눠먹자”, “아저씨 좀 줘” 하면 움켜쥐고 손에서 놓는 법이 없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줄줄 흘러도 절대 놓지 않는 욕심쟁이 꼬마 같은 편집자가 되는 건 아닐까 가끔 돌아보고는 합니다. 그래서 에이전시에서 소개해준 좋은 타이틀이 있거나, 해볼 만한데 저는 역량이 안 될 것 같은 타이틀이 있으면 다른 편집자분들게 전해드리고는 합니다. 나보다 잘 만들어주실 분들이니까요. 새로 온 편집자분들이랑 아이템 회의를 하다가도 그런 말을 자주 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잘 버려야 잘 채운다고요.

깜냥, “스스로 일을 헤아림. 또는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부정적으로 쓴다면야 ‘분수’, ‘주제’처럼 “네 자신을 알라”는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그리 나쁜 말이 아니더라고요. 제 깜냥에서 전력투구를 다하면 되니까요. 그릇이 작으면 작은 대로 가득 담으면 되는 것이지 큰 그릇이 되지 못했음에 서운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요즘은 그런 생각이 많이 드는 계절입니다.

글. 고도비만

2010/08/16 16:04 2010/08/1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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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0년 9월 한비야 선생님 강연회 및 사인회 일정 :: 2010/08/13 16:59

2010년 9월 한비야 선생님 강연회 및 사인회 일정

 날짜  장소  내용
 9월 4일 3시  강남 교보문고  사인회
 9월 6일 2시  김해시  강연회
 9월 6일 6시  부산 센텀시티 교보문고  사인회
 9월 7일 3시  구미시  강연회
 9월 7일 6시 30분  대구 교보문고  사인회
 9월 8일 7시 30분  서울 대치2동 주민센터  강연회
 9월 9일 3시  용인시  강연회
 9월 9일 6시 30분  잠실 교보문고  사인회
 9월 10일 1시 30분  대전 통계청  강연회
 9월 11일 1시  광화문 교보문고  사인회
 9월 11일 5시  희망제작소  강연회


* 상기 일정은 사정에 의해 변동 될 수 있사오니 행사 당일에 확인 부탁 드립니다.

2010/08/13 16:59 2010/08/1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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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비밀스러운 카페의 동네 :: 2010/08/13 15:14

* 이 글에 등장하는 카페는 모두 글쓴이가 직접 방문한 곳이지만 픽션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등장하는 카페 주인, 점원, 손님 및 커피는 모두 지어낸 것임을 밝힙니다. 이곳에서의 홍대는 서교동, 동교동, 연남동, 상수동, 창전동 일대입니다.
 
* 이 글은 <New York,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의 패러디임을 밝힙니다.


홍대, 비밀스러운 카페의 동네
 
#1. 아메리카노는 무지 씁디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혓바닥에 포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뜨거운 감각이 들이닥쳤다가 금새 사라지고, 그 뒤에 씁쓸한 커피 맛이 포연처럼 남았다.
어떤 사람은 스타벅스의 아메리카노가 가게마다 다른 맛을 낸다고 하지만, 난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전 세계 각지에 골든 아치를 뿌리며 들어서 있는 맥도날드가 가진 최대의 강점은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맛'이다.
맥도날드가 있기에 관광객들은 여행지의 '이걸 입에 넣어야 할지 쓰레기통에 넣어야 할지 모를' 음식과 '뭔가 둥둥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물을 억지로 삼킬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빅맥과 코카콜라를 먹으며 관광지의 이미지를 소비할 수 있는 것이다.
맥도날드와 비슷하게 전 세계 어디서나 우리는 세이렌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휠이 달린 스타벅스 매장을 볼 수 있다. 그곳들의 커피 맛이 제각기 다르다면 그것 또한 피곤한 일일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자칭 '매니아'라 일컫는 스타벅스의 추종자들은 전 세계 1만6천226곳에 널려 있는 스타벅스의 모든 맛을 느껴보지 못해 몸살이 났을 테니까.

아무튼, 아메리카노의 맛은 썼다. 내가 카페 모카나 카라멜 마끼아또, 혹은 이 매장에서 가장 이름이 긴 음료 - 이름이 긴 음료는 대개 맛이 달았다 - 를 주문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뿐이었다. 아메리카노가 스타벅스에서 에스프레소와 더불어 가장 저렴한 음료였다는 점과 에스프레소는 경험상 '절대 먹을 수 없는' 음료였단 점 때문이었다.

쓴 맛에 인상을 쓰며 잔을 내려놓고 앞을 보니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나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귀걸이가 스타벅스 특유의 노란 조명을 받아 빛났다.
"이봐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시골 다방에 있는 할아버지같은 거 알아요? 말 한마디도 안하고 지나가는 사람들만 계속 쳐다보고 있는 거."
"적어도 시골 다방에서는 할아버님께 커피 가져와요, 휴지 챙겨와요, 그러지는 않지요. 앉은 자리에 그대로 가져다 드리지."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아, 애초에 소개팅 장소를 스타벅스로 잡은 것이 실수였다. 양산된 이런 분위기에 자신의 욕망을 최대한 포장해 과시하려는 사람들이 드글대는 곳에서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특별한 감정이 움틀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커피랑 휴지 챙겨 드리는 다방 종업원 같다는 거예요?" 그녀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아니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그런 건 아니에요."
저기 또 그와 비슷하게 생긴 한 명이 지나갔다. 나는 말을 하다가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제길슨'인가?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얼른 그를 쫓아가야만 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들은요, 최소한 종업원 앉혀 놓고 심심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거든요. 최소한 '고양이' 같은 시도는 해 보지요. 고, 고향이 어딘가? 양, 양친은 건강하시고? 이, 이리 좀 와봐~ 하고."

스타벅스의 문에 달린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렸다. 서둘러야 했다. 나는 말을 마치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튼 약 30분만에 소개팅은 끝났다. 든 비용은 카페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 3,300원. 그리고 그녀가 마신 아이스 카페 모카 톨 사이즈 4,300원.
 
#2. 달팽이 등껍질 무늬처럼 이야기는 꼬여 가네 - 작업실


 

스타벅스를 빠져 나온 '제길슨과 비슷한 뒷태를 가진 이'는 빠른 발걸음으로 상상마당 쪽을 향해 걸어 내려갔다. 시간은 벌써 저녁 7시. '어울마당길'이라 이름 붙여졌지만 누구도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길을 따라 그의 뒤를 쫓았다. 눈두덩을 검게 칠한 아가씨들이 골목에서 쏟아져 나왔다. 막 식사를 마친 고양이들처럼 그녀들은 서로의 팔짱을 꼭 낀 채 반대편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상상마당 사거리의 가로 줄은 클럽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 가로줄을 오가는 이들은 대체로 클럽에서 춤추고 노는 것을 즐기는 클러버들이다. 주말 밤이 되면 이 길은 한 겨울에도 나시티만 입은 몸에서 김을 훌훌 뿜으며 클럽을 옮겨 다니는 열혈 클러버와 개중 낙오한 이들을 집 혹은 모종의 장소(?)로 실어 가려는 택시의 행렬로 가득해진다.

사거리의 세로 줄을 타고 쭉 내려가면, 사거리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점차 멀어져가는 걸 느낄 수 있다. 주차장과 작은 공원을 가운데에 두고 양 옆으로 뻗은 도로는 사거리에 비해 요조숙녀처럼 조용한 편이다.

이 거리에서 상수역으로 통하는 대로까지 걸으며 주변을 둘러 보면 식사와 술을 함께 제공하는 카페와 다이닝 바들을 여럿 찾을 수 있다.

골목 안엔 책을 읽고 작업에 집중할 수 있을만큼 조용한 카페나 아예 책을 비치해 놓은 소위 '북카페'들도 자리하고 있다. <작업실>은 그중 하나다.

<작업실>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달팽이 등껍질 모양 책장은 책을 굉장히 빼기 힘든 구조로 되어 있다.
이곳의 책들은 세로로 가지런히 세워진 채 손길을 기다리지 않는다. 제멋대로 말려 있는 책장 안에서 제멋대로 몸을 얽은 채 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중 한 녀석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단호해져야 한다. 팔짱을 낀 채로 걸어가는 여자들 중 가장 맘에 드는 사람에게 말을 걸려는 선수가 '아 뭐예요!' 하며 볼멘 소리를 하는 다른 여자들을 제치고 그녀의 손을 잡는 것처럼, 그 녀석을 깔아 누르고 있는 다른 책들을 비집고 그 책을 잡아 꺼내야 한다. 그러려면 다른 책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 따위에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 오직 그 녀석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처럼 행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곳에서는 책과 접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선택이고 모험이다. 카페 안에 가득한 음악과 약간의 담배 연기는 이 모험의 과정을 거치다 보면 신경쓰이지 않게 된다.

제길슨과 닮은 그 남자는 카페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문을 마치고 검은색 가죽 가방을 옆 자리에 내려놓은 그는 그 안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나는 그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그녀가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하며 달팽이 책장에서 책을 꺼내들었다. (계속)


글. 언덕 위의 꼬맹이

2010/08/13 15:14 2010/08/1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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