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비밀스러운 카페의 동네 - Day 1.5 - 지금 나는 너무 행복하다라고 말해야 했었다 :: 2010/08/27 16:08

#2.5 . 그러니까, 아메리카노는 너무 쓰다고요 - 여전히 <작업실>

 작업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사랑에 빠져 있었다. 눈 앞에 펼쳐든 책, 쉴새없이 이어지는 친구와의 수다, 카페 구석 천장에 달린 전등, 혹은 아까부터 귓가에 조근조근 속삭이듯 울려퍼지고 있는 음악 소리. 그들에겐 그 외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들이 카페를 찾는 이유는 누군가와, 혹은 무엇인가와 짧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일 것이다. 방해받지 않고 한 가지 것에 열중할만큼 뜨거워질 수 있는 공간은 점차 줄어들고 있으니까.
 
눈 앞의 아메리카노가 잔 속에서 하얀 김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잔 옆에는 미국 작가 크리스토퍼 무어의 <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 중 무엇과도 사랑을 나눌 수 없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제길슨을 닮은' 남자였다. 만일 그 남자가 제길슨이라면, 이 카페에서 사랑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은 그와 나 뿐일 것이다. 나는 제길슨을 사랑할 수 없을만큼 증오하고 있었고, 제길슨은 적어도 카페 안에서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작업실에는 달팽이 책장 말고도 소소한 소품을 보는 재미가 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포스트 잇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소소한 메모가 적혀 있다. 그저 날짜와 이름, '왔다 갔음'만 덩그라니 적혀 있는 쪽지는 없다. 사람들은 이곳의 쪽지엔 그림으로든 글로든 자신의 '생각'을 담은 이야기들을 남겨놓는다.

왔다 간 걸 기념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보다 진솔한 글을 남긴다.

거장들의 글에서 삶에 대한 초연함이 느껴지는 건,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굳이 기념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제길슨을 닮은 남자는 책을 읽는 와중에 이따금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확인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커피를 마시는 척 하며 그의 동태를 살폈다. 스타벅스에서 융단폭격을 받았던 내 혀는 사탕을 꺼내 물어도 쓰다 느낄만큼 아메리카노의 쓴 맛에 푹 절어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 내가 집중하는 것은 그가 이 '카페'라는 공간을 대하는 태도였다. 예전에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기에, 그가 제길슨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의 태도에 주목하는 것 밖엔 없었다.

  그의 앞에는 그의 손바닥만한 잔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엔 그가 가방에서 꺼낸 검은 색 표지의 외서가 있었다. 그는 책을 뒤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로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그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더 이상 그녀와 연락할 수 없는데, 그는 천연덕스럽게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다니. 나는 그가 제길슨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커다란 손가락으로 어렵게 자판을 누르며 문자를 보내고 있는 저 중년의 외국인이 제길슨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 지금 나는 너무 행복하다라고 말해야 했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느니라" - 마태복음

  지금 나는 너무 행복하다라고 말해야 했었다.

  교과서와 여러 성현들의 말씀은 자기가 행복하다고 여기는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가르쳤지만, 그것을 굳이 말로 표현하라고까지는 가르치지 않았다. TV 드라마와 영화, 신문들은 '고난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삶에 스포트라이트를 퍼부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얼굴에 인상을 쓰며 고뇌하는 검은 수트를 입은 주인공의 등은 항상 조명을 받아 은색으로 찬란히 빛났다. 남들이 웃고 즐거워하는 연회에서도 주인공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랑에 빠진 주인공이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여자와 함께 뒹굴라치면 어김없이 나쁜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울렸다. 남녀 주인공이 행복해하며 끝이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나는 그 뒤에 나쁜 소식을 알리는 전화벨이 울릴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극적인 승리 후에도 "나는 아직 배고프다"라고 외친 히딩크는 성공적인 지도자로 추앙받았고, 그는 '만족'이라는 표현을 아껴 더욱 존경받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행복'이라는 말을 아꼈다.

  그게 문제였다. (계속)

2010/08/27 16:08 2010/08/2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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