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비밀스러운 카페의 동네 Day 2 - 그때는 시간이 멈춰 있는 줄도 몰랐답니다 :: 2010/09/03 19:20
#1. 그땐 시간이 멈춰 있는 줄도 몰랐답니다
▶ 사실 현재의 나는 과저의 내가 아니고, 미래의 나도 아닐 것이다. 수많은 사람처럼 현재의 나는 암흑 속에 있는 의식의 한순간에 불과하다.
<루시아, 거짓말의 기억> 중
제길슨을 닮은 그 남자가 핸드폰 문자 작성을 마쳤다. 그의 손가락이 핸드폰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있던 나는 카페 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말 소리도, 찻잔이 어딘가에 부딪혀 나는 달그락 거리는 소리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카페 안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탁자 위에 놓인 커피에서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주인을 잃은 컴퓨터는 홀로 빛을 내뿜고 있었고, 방금까지 사람들이 앉아 있던 의자는 모두 밖으로 빼어진 채였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 외에 달라진 점은 없었다. 내가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사람들이 카페 밖을 지나가는 무엇엔가 홀려 일렬로 줄을 지어 나가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1974년에 스페인 앞바다에서 수백명의 사람들과 함께 침몰된 주제에 1990년 영국 항구마을 윌립톤에 뻔뻔스레 얼굴을 들이민 라스 트레스 마리아스호를 떠올렸다. 그 배 안에 차려져 있던 음식들은 갓 차린 것 마냥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고 했다. 그 배는 16년의 시간과 수백명의 사람을 집어삼켜 놓고선 오리발을 내밀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유령선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제길슨을 닮은 남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에서 핵폭탄이 폭발해 내뿜는 화염을 뚫고 천연덕스레 멀쩡한 모습을 드러낸 외계인 함선을 바라보는 미 국방성 직원의 눈빛 같았다. 나는 그가 제길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제길슨이라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그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뭔가 욕을 내뱉고 싶었다. 그러나 욕을 내뱉은 건 그가 먼저였다.
"뭐야, 이 얼간이가 여기 왜 있지?"
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제길슨은 내가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안심한 듯 중얼거렸다.
"움직일 수 없는 게 당연하지. 넌 원래 여기 있어서는 안되는 거였으니까."
제길슨이 내 앞에 와서 섰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쏘아보려 했다. 그러나 고개마저 빳빳히 굳어버린 것 같았다. 그 순간 제길슨이 징그럽게 쪼개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아까 카페 안을 둘러볼 때에도 고개를 돌렸다는 기억은 나지 않았다. 마치 카메라가 한번 쭉 비추고 간 것처럼 머릿 속에 카페의 풍경이 들어왔었다. 꿈 속에서 절대 볼 수 없는 곳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네 녀석이 어떻게 나를 따라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봐두도록 해. 이곳이 어떤 곳인지,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길슨이 말하고 있는 사이 카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나는 그 쪽을 '보려'했지만, 뭔가에 걸린 듯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의 다리 밖에 보이지 않았다. 검은 색 하이힐을 신은 여자의 다리였다. 제길슨이 그 사람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하고 말을 이었다.
"... 그리고 네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그 사람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의 얼굴이 머릿 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녀였다. 짝사랑하는 옆집 여자애의 얼굴을 달려가며 힐끗 훔쳐보고 지나가는 것처럼 짧게 지나간 얼굴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 여자가 그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길슨. 이번에도 글렀어요. 이 곳도 아니였다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점점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제길슨은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외국인 특유의 과장된 제스쳐가 역겹게 느껴졌다. 그때 그녀가 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나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걸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다가오는 걸음을 멈췄다는 것도, 그녀가 짧게 뭔가를 생각했단 것도, 그녀가 뭔가를 말하려는 듯 숨을 들이쉬는 그 순간마저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0.00001초도 되지 않는 거의 멈춘거나 다름 없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때 시간이 멈춰 있다는 것도 몰랐다. 머릿 속에서 그녀에 대한 수십가지의 생각과 눈으로 보지 않고도 느껴지는 그녀의 움직임이 휘몰아치며 얽혀들었다.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
잔뜩 긴장한 활시위에서 튕겨져 나온 화살처럼, 그녀가 입을 떼자마자 나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2. 열중할 공간과 소통할 공간, 그리고 사랑할 공간 : 카페 Wonderland
▶ 방금 들려준 이야기는 모두 내게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일이다. 종종 우리의 기억조차도 매우 낯설 때가 있다. <루시아, 거짓말의 기억> 중
그때의 내 모습이 어땠냐 하면, 맛있게 요리되어 온 몸에 잔뜩 소스를 묻히고 접시 위에 도사리고 앉은 스테이크가 딱 그런 모양이었을 것이다. 뚜껑이 덮혀 있는 터라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나를 맛있게 먹어치울 '주인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제 몸에서 올라오는 맛있는 냄새에 자신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제 멋에 겨워 정신 못차리고 이 여자 저 여자를 오가며 '임자'를 찾아 헤매던,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뚜껑을 열어준 것이 그녀였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를 처음 '인식'했던 때는 아직도 머리 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비가 오는 날이었고, 실내는 습하고 어두웠다. 카페 안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만남을 위해 모인 것도 아니었고, 친교를 위해 나누는 대화도 아니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필요'에 의해 모인 관계였다. 우스운 것은 그때 당시엔 굉장히 중요하다 여겼던 그 모임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는 점과,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만남은 대부분 '생각나지 않을 중요함'을 내포한 자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2층에 위치해 있어 한번에 찾기는 좀 어렵지만, 깃발 모양의 간판과 테라스가 눈에 띄는 편이라 작정하고 찾으면 금방 찾을 수 있다.
원더랜드는 테라스와 복층구조를 가지고 있는 카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단체석과 골목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책장 너머 안쪽에 위치한 실내 오브제를 리모델링한 좌석들과 복층에 있는 좌식 자리의 느낌이 각각 다르다.
'작업실'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소음이 있지만 묘하게 집중이 잘 되는 분위기다.
그래서인지 단체석과 벽에 붙은 테이블 자리엔 노트북을 들고 와서 혼자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주 앉아 있다.
그때 나에겐 '중요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없었다. 그저 하루 하루 즐겁기만 하면 되었고, 진지한 것과 어려운 것은 질색이었다. 정색을 하며 다가서는 이들은 무시했고, 어려운 부탁이나 명령을 받게 되었을 땐 대충 웃어 넘겨버렸다. 책임감이 없는 놈, 경박스러운 놈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지만, 내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편하게 생각하고 포기할 건 쉽게 포기해버리는 그런 삶이 '쿨'한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날 모임에서도 나는 '쿨'해지려 노력했다. 모두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 문제를 가볍고 하찮은 것으로 대하는 것이 그날의 '쿨'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런 나의 태도에 반감을 가지다가도 이내 익숙해져서 포기해버리는 것을 보는 게 좋았다. 사람들은 그날따라 말이 없었고, 그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한 진전사항은 없었다. 나는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쿨'했으니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모임이 끝나면 만날 사람과 약속을 정하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날카롭게 나를 쏘아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또 쓸데없이 진지해져버린 사람이 있군'하고 생각했다. 그런 진지한 관심은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때였다.
"당신...!!"
'당신'이라는, 젊은이들 사이에선 흔하지 않은 호칭이 어색하다 느끼기에 앞서, 그 목소리에 담긴 묘한 존재감이 그녀를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