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인터뷰] 어느 풋내기 정원사의 메멘토 :: 2009/11/27 16:52

2009년 11월의 어느 겨울밤, 홍보팀 막내 김현철 씨는 퇴근을 준비하다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콜라병 하나를 발견합니다. 평소 '위장 연중무휴' 슬로건을 부르짖으며 끊임없이 모이를 집어먹는 팩맨처럼 음식을 탐하던 그는 별다른 의심 없이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킵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자기 몸의 이상을 알아챕니다. 홀로 방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의 양 팔에 섬뜩한 붉은 글씨로 낙서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도대체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곰곰이 생각해보려는 찰나, 머리맡에 놓아둔 자명종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습니다.

샤워를 하러 들어갔던 그가 다시 뛰어나옵니다. 양 팔 뿐만 아니라 온 몸에 낙서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낙서는 아무리 비누칠을 해 박박 문질러도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전신 거울 앞에 서서 김현철 씨는 한숨을 내쉽니다. 이 꼴로 회사에 갈 순 없는 노릇입니다. 그는 힘없이 서서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왼쪽 팔에 적힌 낙서를 바라봅니다. 그곳에는  '토트님의 이야기를 잊지 말라' 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때 그는 오래 전에 본 영화『메멘토』의 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몸에 문신을 새기던 영화입니다. 도대체 김현철 씨는 뭘 잊어버렸기에 이렇게 온 몸에 낙서를 해댄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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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이미지와 실제 상품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의 오른쪽 팔에는 '학교 다닐 때는 뭘 하고 살았는가?'라고 적혀있습니다.

다짜고짜 질문질 이라니 오른팔 치고는 참 어이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김현철 씨는 곰곰이 기억을 되살립니다. 그냥 글을 쓰는 것이 좋아 대학도 국문과를 들어갔고 '국문과는 굶는다' 라는 말을 귀에 주렁주렁 매단 채 학교를 다녔습니다. 실제로 굶은 적도 없는데 매일같이 굶는다는 말을 듣고 사니 굉장히 억울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글 쓰는 직업 가운데 가장 잘 먹고 살만한 직업이 뭘까 하고 생각하다가 티비에서 김수현 선생님을 보았습니다. 성공하면 수입이 어마어마하다는 말을 듣고 대뜸 드라마 작가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무작정 방송판에 뛰어들어 보조작가 일을 시작했습니다. 굶는다 굶는다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 번도 굶어본 적 없었는데, 일하러 나갔다가 정말 처음으로 굶어봤습니다. 2달 동안 뭐가 어떻게 되는 지도 모르고 헤매던 끝에,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티비에 이름이 떴습니다. 1월 1일이라는 특이한 생일 덕에 태어나자마자 지방 뉴스에 얼굴 비춘 이후로 두 번째였습니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반년 동안, 김현철 씨의 입과 귀는 관계자 인터뷰를 위해 방 밖으로 나가 좀처럼 돌아오지 못했고, 김현철 씨의 눈과 손가락은 인터넷 자료 검색을 위해 모니터와 키보드에 꼭 붙잡혀 있었고, 그리고 김현철 씨의 소심한 염통은 아주 쫄깃쫄깃해지도록 악플러들에게 꼭꼭 씹히고 있었고... 뭔가 복잡하고 정신없는 날들이었지만, 드라마의 시청률이 양호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쁘던 시절이었습니다. 언제나 추억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거니까요. 아아, 무드셀라 증후군.

붉은 글씨가 오른쪽 손가락 엄지에서부터 기다랗게 줄을 지어 손가락을 타고 오르고 있습니다. '방송이 끝나고, 어쩌다 푸른숲에 오게 되었나?'

방송이 끝나고,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드라마 공부를 하며 다음 작품을 준비했지만, 좀처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피디들에게서  '어려서인지 허울뿐인 글재주만 있고, 경험과 연륜이 없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글쎄요'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졸업이 찾아왔습니다. 우왓, 셸 쇼크(Shell shock)라도 걸린 것처럼 해롱대는 사이 1년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폭탄보다 더 무서운 백수의 공포! 굶는 것을 증오했던 그에게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라는 격언은 저주에 가까웠습니다. 가진 게 글 쓰는 재주밖에 없다고 굳게 믿었던 그는 이번엔 광고를 해보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카피라이터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지랖 좁은 자기가 애써 남에게 권하며 팔려고까지 할 만한 물건이 뭔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건,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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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다시 등장하신 토트님 - 상기 이미지는 본 상품과 동일합니다>

그의 왼쪽 장딴지에는  '그래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적혀 있습니다.

 김현철 씨는 말없이 손을 들어 장딴지를 툭, 하고 가볍게 때려봅니다. 아,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푸른숲에 들어온 이후, 그에게는 '오스카'라는 이름과 작은 삽이 하나 주어졌습니다. 윤기 나는 검은 깃털로 몸을 감싼  '토트' 님이 퍼덕퍼덕 날아오셔서 푸른숲 카페를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서평단을 운영하고, 이벤트를 기획하고, 광고에 들어갈 카피를 작성하고...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웠지만 아직도 배울 것은 어마어마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갓 삽에 흙을 묻히기 시작한 그로서는 토트님이 이야기해주시는 무용담은 공룡이 강원도 감자밭 한복판에 뛰어드는 것보다도 생소하고 신기한 것들이었습니다.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자라나 자기키보다도 훨씬 크게 자라버린 푸른숲의 여러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푸른숲을 찾게 될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고민 중입니다.

그의 눈에 다시 왼팔의  '토트님의 이야기를 잊지 말라'라는 문장이 들어옵니다.

도대체, 토트님의 어떤 이야기를 잊지 말라고 한 걸까요. 그때, 김현철 씨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이『메멘토』에 출연한 가이 피어스처럼 마른 근육질이라는 걸 알아챕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꿈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때 다시 자명종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그제야  '토트님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생각납니다.

지각하지 마세요.

눈을 뜹니다. 해가 중천입니다. 자명종은 수면 중 자체 검열이라도 했는지 자기 전에 맞춰놨던 시간보다 1시간이 느리게 걸려 있습니다. 아아, 큰일입니다. 김현철 씨는 부리나케 일어나 샤워실로 뛰어듭니다. 샤워를 하며 그는 자신의 몸에 낙서는커녕 상처 하나 없다는 걸 알아챕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샤워기를 내려 놓습니다. 적어도, 가이 피어스처럼 정신이 나가버린 건 아니니까요. 이렇게, 푸른숲 정원사  '오스카'로서의 하루가 다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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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상품 사진 - 쉽게 변질될 우려가 있으니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보관해야 합니다>


글. 홍보팀 김현철

2009/11/27 16:52 2009/11/27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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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두 | 2009/12/05 23:20 | PERMALINK | EDIT/DEL | REPLY

    셀프 인터뷰. 글이 참 재밌어요! 정독해서 읽게 되네요. 어쨌건 저도 글 쓰며 먹고 살 직업을 찾던 중이라 눈을 크게 뜨고 읽게 되었네요;) 국문과는 굶는다.. 그런데 오히려 직업을 얻으니 굶었다..는 말은 마음에 남네요; 믿기 싫게도 -- ㅎㅎ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 김현철 | 2009/12/08 11:26 | PERMALINK | EDIT/DEL

      즐겁게 읽어주셨다니 가슴이 벅차는걸요.ㅎㅎ

      글 쓰며 살아갈 수 있는 직업을 찾으신다니,
      어떤 쪽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팔자 좋게 글만 써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조선시대 양반님들이 가끔 부러워지곤 합니다.

      그래도, 열심히, 즐겁게,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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