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형님 사촌 형님 시집살이 어떱뎁까?
이애 이애 그 말 마라 시집살이 개집살이.
앞밭에는 당추(唐추)심고 뒷밭에는 고추 심어, 
고추 당추 맵다 해도 시집살이 더 맵더라. 
...
외나무다리 어렵대야 시아버니같이 어려우랴? 
나뭇잎이 푸르대야 시어머니보다 더 푸르랴? 
시아버니 호랑새요 시어머니 꾸중새요, 
동세 하나 할림새요 시누 하나 뾰족새요. 
시아지비 뾰중새요 남편 하나 미련새요, 
자식 하난 우는 새요 나 하나만 썩는 샐세. 
...

민요 <시집살이 노래> 중 
 

<예나 지금이나 '시집살이'와 '고부갈등'은 훌륭한 문학 작품(?)의 소재였던듯 싶습니다>


결혼을 다른 말로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하지요.
'사람이 하는 일 중에 가장 큰 일'이 바로 결혼이라는 겁니다.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예전에는 혼례를 남녀가 만나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조상의 대가 끊기지 않게 하는 의식으로 여겨 관혼상제 중에서도 특히 중요시 여겼다고 하네요. 제사나 대를 잇는 것에 대한 가치가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개인의 행복이 더 중요시되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서로 모르고 살았던 남녀가 만나 마음을 열고 부부의 연을 맺고, 그 두 사람의 인연을 바탕으로 양가의 여러 사람들 역시 친인척 관계를 맺게 된다는 데에서 결혼은 사람의 인생에서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이라 여겨지는 만큼, 결혼은 수많은 난관을 수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30년 가까이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던 남녀가 서로를 이해하며 맞춰가는 과정이 있어야 하고,
집, 결혼 비용 등 결혼에 필요한 현실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집안 어른들의 이견을 조율하는 것도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평생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 책임감을 갖추어야만 하니까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갖춰지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고, 우리는 주변에서 이로 인해 갈등을 겪는 사례를 여럿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불륜, 고부갈등, 삼각관계, 이혼... 결혼과 관련된 수많은 갈등들은 우리에게 친숙한 만큼 여러 갈래로 재해석되어 드라마, 소설, 영화 등의 소재가 되고 있지요.


<고추 당추보다도 맵다는 시집살이 ㅠㅠ>

결혼을 독립과 동일시하는 서양과 다르게, 유교적 가치관이 남아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시집을 가는 '친영례(親迎禮 : 남자가 여자 집으로 찾아가 예식을 올리고 신부를 데려오는 혼례 방식)'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요즘엔 부부끼리 독립해서 사는 경우가 많지만, 결혼을 한 여자들은 남편의 집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이 보편적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귀한 딸이 하루 아침에 시부모님을 모시며 집안일을 꾸려나가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거예요. 친부모님의 배려와 관용(?)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집에서의 삶. 게다가 낯선 집에서 어렵기만한 두 어르신을 모시고 살아가야 하는 상황. 그 과정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었고, 이는 '시집살이'의 가장 커다란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 시집살이는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명나라 혼인 풍속은 어떤데요? 우리와 많이 달라요?"
운휘가 숙안 옹주에게 물었다.
"명나라에서는 남자가 장가가는 게 아니라 여자가 시집가는 거라잖아. 남편이 처가에 찾아가 예를 취하고 부인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게 바로 친영례라는 거지. 우리처럼 혼인하고 처가에서 사는 게 아니라 시가에서 살아야 하는 거라고. 일반 백성들도 혼인하면 친정 식구들하고 사는 게 우리의 풍습인데, 혼인하자마자 생판 모르는 시가의 식구들과 계속해서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상상해 봐. 얼마나 끔찍하겠니?"
숙안 옹주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문제는, 명나라 혼인 풍속을 왕실에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거잖아요. 선왕께서도 친영례를 정착시키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얼마 전에 전하께서 친영례를 정착시킬 방안을 내놓으셨다지요. 무조건 백성들에게 친영례로 혼인 풍속을 바꾸라고 강요할 게 아니라 왕실에서 먼저 모범을 보이면 좋겠다고요."

<옹주의 결혼식> 중에서 

흔히들 조선을 유교의 국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조선시대 초까지만 해도 조선은 유교 국가라고 부르기 어려웠습니다. 전 왕조였던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는 국가였고, 일반 백성들의 삶은 자유분방하고 남녀의 지위도 큰 차이가 없었지요. 조선 백성들이 유교의 예법을 받아들이게 된 건 건국 후 200년이 지나서부터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남자들이 장가를 가서 처가살이를 하는 것이 보편적인 관례였었죠.

"... 지금껏 지켜온 풍속은 혼인하면 남편이 처가에 와서 사는 거잖아?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라고 바꿔야 하지? 왜 남편의 집에서 사는 게 좋은지, 난 잘 모르겠던데?"
운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었다.
"그것은 예전의 풍속이 지나치게 처가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처가에 살다 보니 남편의 뜻을 좇아야 할 아내가 친정을 믿고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제사도 아들이 아닌 딸이 지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아이가 태어나도 친조부모보다 외조부모를 먼저 알게 되고 친가의 가문이 미미할 경우 우습게 여기는 일도 있었지요...."

<옹주의 결혼식> 중에서 

<옹주의 결혼식>은 조선 최초로 유교의 예법대로 '친영례'를 치룬 숙신 옹주의 결혼식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태종의 서녀, 즉 세종 대왕의 이복동생이었던 그녀는 백성들이 유교의 예법을 잘 따르지 않으니 왕실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친영례의 예법대로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요.

파원군(坡原君) 윤평(尹泙)이 숙신 옹주(淑愼翁主)를 친히 맞아 가니, 본국에서의 친영(親迎)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7년 3월 4일 기사 

사실 숙신 옹주의 결혼식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저 한 줄의 기사가 전부입니다. <옹주의 결혼식>은 이 한 줄의 기사를 바탕으로 맨 처음으로 '시집살이'란 낯설고 두려운 상황을 맞이해야 했던 그녀, 운휘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요. 생모와 떨어져 궁 안에서 자라난 그녀는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 없이 외롭게 살아갑니다. 주변 옹주와 왕자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하는 가운데, 그녀 역시 배필을 맞이해야 할 때가 되었지요. 그러나 호기심 많고 구속받는 것을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 탓에 그녀를 지켜보는 왕과 왕비는 간택령을 내려도 지원할 사람이 없을까 항상 고민입니다.
이런 속사정도 모르고 숙신 옹주는 '결혼 따위 하지 않아도 그만이지'라는 생각을 하며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누구 하나 돌보아주지 않는 궁궐 생활에 지쳐가지만, 주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바라보며 결혼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하나 둘 생각해 보게 되지요.

 



"... 잔소리쟁이 할망구랑 함께 늙어 가면 서 버티고 살아 오늘에 이르렀습죠. 앞으로 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반백 년 동안 온전한 내 편이 있다는 건 이 험한 세상 살아가는데 든든한 일 아니겠습니까?"
운휘는 할아범이 그어 놓은 선 밖에 서서 할아범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마와 뺨에 깊게 팬 주름이 더는 흉하게 보이지 않았다.

<옹주의 결혼식> 중에서 
 
그러나 왕이 그녀에게 명령한 것은 여태까지의 방식이 아닌 '친영례'를 통한 시집살이었습니다.
과연 그녀는 순순히 왕의 명을 따라 시집살이를 하게 되었을까요?
굳이 그녀에게 친영례를 명령한 왕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어머니도 없이 외로이 자라난 그녀는, 마음 풀어놓을 곳 하나 없는 시집살이를 무사히 해낼 수 있을까요?

이 모든 이야기는 <옹주의 결혼식>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옹주의결혼식
카테고리 어린이 > 초등5~6학년
지은이 최나미 (푸른숲주니어,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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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푸른숲 정원사